작성일 : 21-03-28 19:00
<한지와 나> "신재돈, 일상의 시간을 잡아 찰흔을 남기다" (전양배 군장대학교 교수)
 글쓴이 : 관리자
잡지 <한지와 나> 2020년 겨울호

"신재돈, 일상의 시간을 잡아 찰흔을 남기다."

전양배 (군장대학교 교수)

  신재돈은 1959년 전남 광주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사업체를 운영하다가 47세인 2007년에 호주 멜버른에 이주하여 RMIT 대학교의 미술대학에서 공부를 시작하였다.  늦은 시작에 따른 짧은 경력을 만회하기 위해 작업에만 전념하였는데 그간 호주, 한국 등에서 20여회의 개인전을 하였고, 뉴욕, 베를린, 방콕에서 레지던스에 참여하며 시야를 넓히고 경력을 쌓았다.
  그는 한국인으로써 해외 작품 활동에서 어려운 점은 무엇보다도 소통의 한계라고 한다.

  호주에서 미술대학을 나오고, 호주 교수들이나 동료 작가들과 교류를 갖고는 있지만, 호주사회에 대한 인식의 정도가 그들에 미치지 못하는 한계이다.  이것은 마치 한국에 와 있는 외국인들의 한국사회, 역사, 정치에 대한 지적 이해에 도달하기 쉽지 않은 것과 같다.  그래서 현지 사회에 대한 발언이 어렵고, 그 할당 몫이 적을 수밖에 없다. 
“만약 섣부른 생각을 예술로 표현하면 피상적이어서 유아적 수준이거나 편협되어 잘못된 시각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한때 호주로 오는 난민의 배가 파선되어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 이를 주제로 작업하였다가 크게 후회한 적이 있기도 합니다.  정치적인 올바름 이전에 시야의 좁음이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전제조건은 작가로서의 입지에 제한으로 나타나고 주류담론에서 소외되어 이방인 같은 느낌을 스스로 가지게 된다.  그러나 작가는 한편 이런 감정 자체가 반영되어 예술적 소재가 된다는 것을 깨달아 가고 있고 자신만의 이야기를 찾아가는 과정이 예술 활동이며 이런 과정을 겪고 나서야 좋은 예술을 하게 되는 동력이 된다고 말한다.

  코로나 이전에는 한국과 호주를 끊임없이 왕복하며 작업했다.  한국은 호주보다 편하고 익숙해 더 바쁜 편이고 호주에 되돌아오면 만날 사람도 줄어들어 작업에 대한 집중도가 높다 한다. 
“여행이나 이동은 작가를 깨어 있게 하는 것 같습니다.  한곳에 오래 머물면 잘 안보입니다.  호주에 돌아와서 작업할 때 새로운 발상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 이방인으로 있는 것이 작가로서 장점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의 작품에서 한반도 정세와 같은 시사문제를 날카롭게 파고드는 걸 보면 좀 더 객관적인 시각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일상생활의 삶 속에서 마주치는 모든 장면들, 즉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들에서 주로 작품의 영감을 얻는다.  돌아다니며 직접 경험한 것, 여행지의 광고전단, 신문, 뉴스가 작업의 소스가 되었다.  그에게 있어 잦은 여행과 이것에서 얻어지는 모티브를 이용한 회화작업은 세상을 관찰하고 교감을 나누는 과정이다.  그는 작업에 있어 드로잉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길거리, 전철, 카페, 식당, 쇼핑센터 등 삶의 일상공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포착하는 것 (작은 수첩위에 스케치하거나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는 것), 눈으로 보고 작업실에 가서 선을 긋거나 점을 찍는 것도 드로잉이기에 작가의 일상은 드로잉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드로잉은 신재돈 작업의 가장 주요한 요소이자 모든 것의 출발점이다.

  신재돈은 무언가를 포착해서 마크를 만드는 것이 드로잉이라 생각한다.  이 마크메이킹에서 사람들을 주로 곡선이나 점 같은 것으로 표현하고, 사람을 둘러 싼 혼경은 직선으로 표현한다.  직선은 인간이 만든 것들, 즉 인공물들이고 도시나 건축 등 문명의 상태를 나타내고 있으며 이 둘이 만들어내는 공간의 흔적들을 바탕으로 스튜디오 작업을 하는 것이 신재돈의 회화이다.  즉 관철한 무엇인가를 종이 위에 포착한 드로잉과 이의 축적 속에서 발행하는 상상이 결합하여 최종적으로 나타나는 물건(object)이 회화작품인 것이다.  그래서 신재돈의 드로잉은 정신적(spiritual)인 모든 활동이며, 페인팅은 물질적(physical) 결과물인 것이다.

  신재돈은 서양화를 주로 그리면서도 바탕재로서의 한지의 활용에 대해 실험적인 관심이 많은 작가이다.  RMIT 대학 재학시절 드로잉을 전공하면서 종이가 중요한 매체임을 인식하게 된다.  주로 프랑스산 캔손 10미터 롤 페이퍼를 사용하였는데 전 세계 아티스트들이 쓰는 종이로 주 생산지는 프랑스, 이태리, 영국이다.

  신재돈은 린넨캔버스의 유화 작업은 시간이 오래 걸려 그림이 차분해지는 경향이 있고 종이 위 작업은 더 자유롭고 더 다이나믹해서 실험성이 강하다고 말한다.  종이 작업에 대한 관심은 그의 첫 전시인 한국 인사동의 고도 갤러리 전시 작품의 절반을 종이 위의 작업을 선보일 정도로 높다.  그래서 현재까지도 여전히 캔버스와 종이를 함께 사용하고 있다.

  한지를 사용하게 된 계기는 인사동인지 아니면 전주인지에서 150x200cm 2,3합 장지를 많이 샀는데, 가볍고 질기며, 서양종이와 달리 흡수성이 강한 특성이 있어 여러 재료를 배합해 사용할 때 좋은 효과가 나타나는 것을 알게 되고부터였다.  또 다른 계기는 2012년 뉴욕에서 3개월 머무르며 작업할 때 한국에서 온 서용선 작가로부터 얻은 닥종이를 사용하고 부터라고 할 수 있다.  한지위에 먹과 마커를 사용해 보았는데 매끄럽고 아크릴릭 물감의 착색 느낌이 매우 좋았었다고 한다.  뉴욕에서 시도해 본 닥종이위의 아크릴릭화 작업은 그의 작업에 있어서 무척 중요한 계기가 되어 한국에 가면 항상 한지를 대량으로 사와 호주에서 작업하고 있다.
 
  그는 여행이나 레지던시 중에는 가벼운 일합지를 사용하기도 하지만 주로 이합지의 장지를 선호한다. 한지가 흡수성이 좋고 가볍고 질긴 특성이 있으나 흡수성은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흡수를 막기 위해 캔버스 천에 size(아교나 PVA glue로 표면은 막는 것)를 하거나, 젯소(gesso)를 칠하고 작업한다.  전주 한지 이합지에 젯소를 일회 칠하고 아크릴릭으로 작업하면 아주 적당히 흡수되고 붓도 잘 나가서 이 조건을 좋아한다.

  멜버른에서 활동하는 아티스트 David Frenny-Mills는 본인의 작업에서 잉크의 흡수 정도와 그로 인한 색의 조화가 중요한데 표백하지 않은 이합지가 자신의 작업에 적합하고 잉크가 뒷면에 배어 나오는 것을 이용 스스로 배채법을 발견하여 사용하기도 한다.  현재 이 두 작가는 전주한지를 함께 공동 구매하고 있다. 

  신재돈 작가는 전주의 성일한지에서 한지를 구입한다고 한다.  한지는 이합장지임에도 불구하고 1평방미터에 70g에 불과할 정도로 가볍다.  서양종이가 무거울 뿐만 아니라 구겨짐을 펴기 어렵고 쉽게 찢기는 등 보관 및 보존이 어려운 것에 비하면 구겨져도 펼 수 있고, 얇으면 배접을 할 수 있고, 오염되면 세탁이 가능하고, 수 백년간 보존할 수 있어 작업에 있어 거의 완벽한 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한지가 수묵이나 한국화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회화 일반의 그라운드로 가능하리라고 본다.

  오일프라이머로 바탕을 칠할 때 오일이 배어 나오면 장기보존이 어렵고 결국 썩에 되는데 한지에 두터운 유화를 실험했을 때 린시드오일이 뒷면으로 배어 나오지 않았다.  한지의 재질은 견고해서 잘 찢기지 않아 무거운 유화물감을 두텁게 올려도 잘 견뎌 유화나 아크릴릭, 기타 혼합 재료를 한지에 적용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이야기한다. 
 
  개선점으로 10호 정도의 소형 작품에서는 별 이상이 없으나 대형 작품의 경우 자체 하중으로 인해 표고를 해야 하는데 캔버스 고정시 가해지는 장력을 견딜 수 있는 강도를 확보할 수 있다면 린넨캔버스와도 경쟁력이 있을 뿐만 아니라 한지의 특성을 장점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바탕재가 될 것으로 판단된다.  크기에 있어서도 작가용 린넨은 대개 210cm x 10m의 롤로 생산되어 대작 제작이 가능한데 이런 점도 개발의 방향성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신재돈은 “한지의 표면, 온화함, 적당한 흡수성과 그로 인한 은은한 배색효과로 인해, 서양의 재료인 유화나 아크릴릭화를 한지에 계속 실험 해보려 합니다.  이를 통해 한지만이 품을 수 있는 회화의 질을 추구하려는 생각도 합니다.  그리고 효율적인 디스플레이를 어떻게 할 수 있는 꾸준히 시도해 보려 합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신재돈은 지금까지 일종의 리얼리즘 미술을 해왔다.  사물들을 보고 그에 대한 정직한 반응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었다.  리얼리즘은 대상을 미화하거나 이상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나타내려는 태도로 추하거나 무서운 것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다.  세상이 마냥 아름답지만은 않다고 생각하기에 작가의 작품도 아름다운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런데 올해 코로나19 영향으로 7개월 동안 고립되어 현장성을 상실하고 상상에 의존하며 계속 작업하다 보니 디테일이 사라지면서 형태가 단순화되고 있다. 

  “치장이나 장식이 사라지면 그림이 공허해지지만, 동시에 단순화는 장점이 되기도 합니다.  이런 저런 시도 끝에 더 밀어붙이며 그림이 점차 추상적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형태를 배제하고 절대적인 감정의 깊이만을 표현하는 시도를 해보고 싶습니다.”

  작가는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시간’이라 답한다.  “인생은 짧고 시간은 끝없이 흘러갑니다.  그 각각의 시간 속에 작품으로 흔적을 남기고 싶은 것이 인간적인 욕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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